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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북리더스, 2012-08-02 10:39:04

조회 수
3779
isbn
9788991510876
저자
박노자,허동현 공저
출판사
푸른역사
출판일
2009-03-02
정가
15,000
책소개
한국 근대 100년, 길들이기 그리고 편가르기를 넘어

한국 근대 100년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어떠한가? 그리고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 역사 최전선》(2003),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2005)를 통해 조선인의 대외관과 친미 반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대와 전근대 등 한국 근대 100년의 다양한 모습을 토론하던 박노자와 허동현이 논쟁의 마침표를 찍는다.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두 저자의 논쟁에 담긴 한국 근대 100년의 여러 풍경들은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자 ‘내일의 어딘가’를 위한 진심어린 조언이다.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에서 주목하는 한국 근대 100년은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다. 박노자에게 한국 근대 100년은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비롯된 ‘길들이기’다. 노동자에 대한 무제한적 착취,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차별 등 거시적 문제는 차치하고 미시적 영역을 들여다봐도 우리의 근대는 타자와의 연대를 잊어버린 공격과 경멸뿐이다. 근대국가 만들기와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최우선의 목표에 따라 근대 국민으로 길들여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수자에 대한 무관심, 후진국에 대한 경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박노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달리 허동현에게 한국 근대 100년의 자화상은 ‘편가르기’다. 지금 우리가 민족 지키기와 근대화 이룩하기라는 근대 과제, 그리고 타자·타민족과 더불어 살기나 양성평등 사회 실현하기와 같은 근대 이후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보는 허동현에게 아프게 다가오는 근대 100년의 모습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편가르기다. 친일이냐 반일이냐, 민족이냐 아니냐를 잣대로 너와 나를 구별하던 편가르기를 넘어설 때 좀 더 나은 내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는 자신이 지닌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시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이다. 내 관점만이 옳다고 고집 부린다면 다양한 시각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소통’은 바로 이러한 태도, 자신만이 맞다는 아집과 교만을 버리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박노자와 허동현의 한국 근대 100년 논쟁은 이 같은 소통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 절대적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린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논쟁에서 우리는 한국 근대 100년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대 100년의 다양한 풍경들―지식인, 여성, 대중문화 그리고 종교

이광수, 두 얼굴의 지식인
근대로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식민지화. 일제 강점기는 봉건 사회를 넘어서는 근대의 출발점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화 덕분에 일그러진 형상으로 기억된다. 이는 당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이중적 모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노자와 허동현은 이 같은 일그러진 근대의 형상을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 이광수를 통해 살펴본다.

박노자에게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애정 문제 탐구에 몰두하기도 하고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을 애써 본받으려 하는 과민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힘과 살인과 “황인종의 단결”을 예찬하는 친일 파시즘의 특색이 강했던 국가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간디에 대한 예찬을 통해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한다. 그러나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기도 한다. 모순적인 이념과 사상의 혼재 그 자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박노자는 이러한 이광수의 두 얼굴이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 단체’로 본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시켰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의 신화’를 끝내 해체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파시스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허동현은 이광수가 한 얼굴로는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고 다른 얼굴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두 얼굴의 야누스적 존재이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가치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였고,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을 최우선에 둔 것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선 민족이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이고 나태하고 겁이 많고 진실성이 없는, 아주 열등한 성격”때문에 식민화 당했지만 “중심인물과 개조 단체의 목?의식이 뚜렷한 개조 노력이 있으면 그 아름다운 근본적 성격이 회복되어 우등민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광기의 시대를 산 지식인의 아픔과 고뇌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우리의 근대 100년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허동현은 말한다. 자기만의 가치와 신념을 고집하고
자기와 지향을 달리하는 쪽을 배척하는 것은 증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이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 경험이라고. 이광수는 우리에게 이처럼 증오와 배척을 넘어선 관용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닐까.

‘여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매춘 여성에서 신여성까지
한국 근대 100년을 논하면서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여성’이 있다. 신분의 예속에 얽매여 현모양처로 살아가기를 강제당해왔던 여성들. 이는 봉건 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박노자는 이 같은 여성의 예속을 매춘 여성과 신여성을 통해 고발한다. 성인 여성 15명 중 적어도 1명 정도는 매춘을 하는 매매춘 공화국. 2004년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마지막 “현대형 노비”들은 일견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보자. 과연 그럴까? 여전히 현실은 암울하다. 집창촌의 해체는 성매매의 음성화를 불러왔다. 정부의 허울뿐인 ‘탈성매매 지원’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하층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매춘 여성을 다시 성매매의 사슬 속에 가둔다. 매춘 여성의 역사를 보면 이 같은 양상은 어쩌면 당연하다. 정부에 의해 “외화 벌이의 주역”이자 “애국자”로 칭송받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양놈의 걸레”일 뿐이었던 그들 매춘 여성들은 결국 ‘우리’, ‘민족’의 테두리에 예속당한 존재였다.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근대화의 산 증인이 바로 이들 매춘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여성의 예속은 일제 강점기 신여성에게서도 엿보인다. 성리학과 메이지 일본과 기독교가 모든 여성들을 “정숙한 숙녀”와 “음탕한 요부”라는 두 범주로 나누고 심판하는 남성중심주의적·중산층 위주의 이분법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근대 여성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신여성조차 이 같은 강고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반면 허동현은 매춘 여성과 신여성들의 주체적 성격에 좀 더 주목한다. 허동현의 눈에 비친 매춘 여성은 단순한 “성노예”, 자본주의 체제와 남성 중심 사회의 구조적 산물이자 희생자가 아니다. 그러한 시각은 여권의 신화화를 통해 여권운동가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매춘 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나누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매춘 여성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성노동자이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꿈꾸고 있다. 마찬가지로 민족과 국가가 최우선 가치이던 한 세기 전 이 땅의 매춘 여성들도 민족과 국가의 동등한 일원이길 꿈꾸었다. 신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신여성들은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고 가장에게 예속되게 하는 가부장제라는 비인간적 억압의 기제에 맞서 ‘인형의 집’을 뛰쳐나왔다. 식민지라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신여성들은 여성의식과 직업의식, 민족의식을 갖고 남성 지배 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장애를 넘어 남녀동권 사회 만들기, 외세 쫓아내기, 그리고 국민국가 세우기라는 중첩된 과제 수행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속된 여성, 그리고 그러한 예속의 사슬을 끊어버리려던 여성. 한국 근대 100년은 우리의 누이이자 어머니이자 그들 자신이었던 여성의 다양한 자화상 속에 녹아 있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희생만을 강요당해왔던 여성의 홀로서기는 타자와 더불어 살기라는 우리들의 지향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대중문화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한류”. 최근에는 약간 시들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중문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자랑거리 중 하나로 칭송받았다. 다른 눈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들이 한국 스타에 열광하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소비하는 현상은 전례가 없어서였는지 상당히 이채로웠다. 무엇이 그들을 한국의 대중문화로 끌어들인 것일까?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박노자는 서구, 특히 노르웨이를 위시한 유럽의 한국 영화와 태권도 열풍에 슬며시 딴지를 건다. 그들이 과연 “한국”을 소비하는 것인가라고. 박노자는 말한다. 한국 영화나 태권도가 그들의 식탁에 오를 때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라 “아시아 문화”라고 적혀 있다고. 서구가 소비하는 한국 문화는 그들이 은연중 품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자극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러한 시각에서 박노자는 아쉬움을 표한다. 비판적인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진정한 작가들의 민중의 서사시보다 자본들이 노련한 솜씨로 다듬어 만든 포? 좋은 폭력물과 “신비물”이 외국에 훨씬 더 강력하게 진출하여 “코리아” 이미지 형성에 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이 상당히 아쉽다는 것이다.

허동현은 박노자가 말한 서구의 한류가 아닌 동아시아의 한류를 통해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을 비튼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악몽에서 세상을 깨우는” 도구여야 한다는 박노자의 생각과 달리 욕망을 파는 문화상품이라고 보는 쪽에 서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살찌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영화인들이 치열한 역사의식과 작가정신, 그리고 비판정신과 사명감을 간직하고 있기에 한국 영화가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따른 타락의 유혹과 할리우드 영화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민화나 헤게모니 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를 적게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문화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한류를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구호 속에 가둔다면 한류와 같은 문화 현상의 지속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허동현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문화의 쌍방통행 이후 한류와 같은 문화 현상의 지속을 위한 그다음 징검다리는 아마 상대에게 유의미한 타자로 거듭나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문화가 동류東流하던 옛날의 영광이나 오늘날 일부 대중문화에 치우친 한류만을 자랑하고 세계인들 앞에‘유의미한 타자’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결코 우리는 지구마을의 거주자들과 당당히 연대하고 협력하는 새 시대를 열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얼마 전 한국 종교계의 큰 인물인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을 찾아 추기경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아쉬워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소외받은 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던 김수환 추기경의 자취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의 최우선 역할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 100년을 가로지르는 종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박노자는 기독교와 무속신앙, 그리고 불교에 눈을 돌려 한국 종교의 명과 암을 살핀다. 먼저 무속신앙.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들은 무속신앙을 한국 민중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인의 “열등성”, “주술에 의존하려는 의타적 성격”의 증거였다. 그러나 무속신앙은 단순한 열등성의 표상이 아니다. 공동체의 안정과 합심, 갈등의 완화와 개인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완화제 역할도 수행했다. 그럼에도 한국 근대는, 특히 기독교는 무속을 배척했다. 미신 타파의 광기 속에서 무속은 자신의 긍정적 역할을 거세당한 채 배척과 억압의 대상으로 화했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 중 하나인 불교는 어떤가? 박노자에게 한국 불교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역사”다. 권력에 아부하고 사리사욕에 치우쳐 자신이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인 “무소유”의 실천에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무소유”는 “지금 여기”에 무계급 사회를 일구어가는 사회주의 실현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불교와 사회주의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직시할 때 한국 불교의 제자리 찾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허동현은 이 같은 박노자의 주장에 대해 무속과 기독교, 불교의 명과 암을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속 역시 종교적 “마취제 장사”에 목메는 등 나눔과 더불어 삶이라는 종교의 정신을 망각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불교가 단순히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비자주적 종속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는 것은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에 온몸을 바쳤던 한용운이 잘 보여준다.
종교에는 분명 개인의 불안을 치유하고 어루만지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소외된 이웃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도록 한다. 비록 오늘날 한국의 종교가 장삿속에 매몰되어 이 같은 기능 수행에 소홀한 점이 없지 않지만 비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비판적 성찰과 자긍의 날개를 동시에 펼쳐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목차
들어가며|총체적, 다성적多聲的 역사를 위하여!

제1부 지식인과 친일

이광수가 지닌 두 개의 얼굴
사랑 예찬과 일그러진 근대 찬양|박노자
“민족을 위한 친일”, 처단에 앞서 정밀한 이해 필요|허동현

〈민족개조론〉을 말한다
‘우리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지적 사기’|박노자
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로서의 〈민족개조론〉|허동현

제2부 여성

매춘 여성의 어제와 오늘
기생과 매음녀, 그리고 페티시 클럽 여종업원|박노자
성노예인가 성노동자인가, 한 세기 전과 오늘 매춘 여성의 꿈|허동현

신여성의 꿈
개화기와 그 후의 신여성 또는 욕망의 정치|박노자
내 몸의 주권? 민족의 독립? 계급의 해방?|허동현

제3부 대중문화

한류韓流, 타자의 한국 보기
“서구의 한류”란 무엇인가|박노자
한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허동현

식민지 시대의 영화
근대의 가시성可視性과 동원의 정치|박노자
‘해방의 무기’인가, ‘욕망을 파는 문화상품’인가|허동현

제4부 종교

무속과 기독교의 명암
무속 혹은 “마취제 판매 시장”에 대한 단상들|박노자
종교가 아편이면, 신도는 마약중독자?|허동현

한국 불교를 보는 두 개의 시선
한국 불교의 “부끄러운 역사”|박노자
시민의 눈으로 불교 역사 들여다보기|허동현

제5부 한국 근대 100년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지나간 100년?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복지와 여성 문제|박노자
지난 한 세기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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